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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인민당(PPP)의 리더십 : 부토 가문의 변화, 도전 그리고 생존

by 이조은세상 2024. 1. 30.

2024년 파키스탄 총선과 관련된, 부토 가문의 파키스탄 인민당( PPP)의 창립부터 줄프카르 알리 부토, 베나지르 부토, 빌라왈 부토까지의 역사적인 여정을 알아보고, 파키스탄의 미래를 위해 빌라왈 부토가 어떻게 도전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가운데 성인 남성이 줄프카르 알리 부토 본인, 오른쪽 젊은 여성이 베나지르 부토, 부토가족의 예전 사진

1. 파키스탄 인민당(PPP) 창립과 부토 가문의 탄생 

Pakistan People's Party(PPP)

파키스탄 인민당(PPP)는 1957년, 줄프카르 알리 부토에 의해 창립되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국가를 '이슬람 사회주의'를 통해 현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좌파 정당, 가장 오래된 정당, 가장 큰 좌파 정당으로 신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역대 2명의 총리를 배출한 파키스탄의 명문 정치가문 부토가문의 정당에 대해 알아봅니다.

 

2. 파키스탄의 정치의 중심, 부토 가문의 역사

부토 가문은 파키스탄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들의 정치 생활은 불안정했습니다.

 

줄프카르 알리 부토 

1928년 1월 5일, 파키스탄 신드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지주였으며 신드주의 명망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카라치의 성공회 대학에서 공부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과학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링컨스 잉 인즈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1951년 이라크 대사, 그 후 유엔 대표로 임명되었으며, 1957년에 청년을 대상으로 한 정치 단체인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설하게 됩니다. 그는 이 단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군사 독재자 아유브 칸 장군의 총리를시작으로, 1971년에 독립적으로 정치인의 행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제4대 대통령 (1971~73) 그리고 제 9대 총리(1973 ~ 77)에 취임하게 됩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핵 무기 개발을 추진하였고, 파키스탄의 국제적 위상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1977년 군사 쿠데타로 끝나게 됩니다. 1971년에 발생한 동파키스탄의 분리와 그로 인한 대량 살상에 대한 책임을 묻고, 1979년에는 정치적 적을 암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이는 상당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같은해 4월 4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1943년 15살의 나이에 사촌과 결혼하였지만 자식을 두지 않은채 헤어지고, 1951년 두번째 결혼을 통해 2남2녀를 두게 되는데 그의 장녀인 베나지르 부토는 후일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르며 정치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줄프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창립자이며, 그의 가족은 여전히 파키스탄의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베나지르 부토

베나지르 부토는 1953년 6월 21일에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창립자인 줄프리카르 알리 부토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77년, 아버지가 군사 쿠데타로 통치에서 물러나게 되자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파키스탄 인민당의 지도자가됩니다.

 

1988년에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총리,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여성 정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총 두 번의 총리직을 맡았습니다(1988년~1990년, 1993년~1996년). 그녀의 정부는 경제 개혁과 여성의 권리 증진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녀는 1987년에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와 결혼하였고,  3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베나지르 부토의 정치 생활은 부패와 스캔들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두 번의 총리 임기를 모두 조기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2007년, 세 번째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돌아왔으나 같은해 12월에 폭탄테러로 암살되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파키스탄 내외를 충격에 빠뜨렸고, 그 배경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있습니다. 

 

생전 그녀는 외 아들 빌라왈 부토를 정치 후임자로 내정해 두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사망후 3일만에 당시 영국 유학중이었던 19살 대학생 빌라왈 부토가 인민당의 당수직에 올게 됩니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이자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당수직을 대행했고, 학업을 마친 빌라왈은 2011년 부터 당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1955년 7월 26일에 파키스탄 신드 주의 나우더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비즈니스 가문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는 성 패트릭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런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87년, 파키스탄 인민당의 지도자인 베나지르 부토와 결혼하였습니다. 이들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으며, 그중에는 현재 파키스탄 인민당의 지도자인 빌라왈 부토가 있습니다.

 

자르다리는 처음에는 비즈니스에 종사하였지만, 그의 아내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그 역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90년대에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로 재직하던 동안 그녀와 함께 수많은 부패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나지르 부토가 2007년에 암살당한 후, 자르다리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지도자로서 그녀의 역할을 계승하게됩니다. 그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파키스탄의 대통령으로 재직하였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국가의 민주화를 추진하였으나, 그의 통치는 부패와 비리로 불명예스럽 끝났습니다. 그는 2013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후에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지도자로서 정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빌라왈 부토

1988년 9월 21일에 파키스탄의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와 전 대통령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와 중동학을 전공, 그 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공정책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부 시절에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 그의 어머니가 암살당한 후, 그는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가족의 정치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이 정당을 통해 파키스탄의 민주화와 사회 정의, 그리고 빈곤 퇴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 경력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그는 이미 파키스탄의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젊은 세대와 여성, 그리고 소수자와 같은 미래의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투표층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왼쪽 빌라왈 부토, 오른쪽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전 대통령

3. 빌라왈 부토 : 부토 가문의 미래와 파키스탄 인민당의 리더십

현재 PPP는 베나지르 부토의 아들 빌라왈 부토가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추구했던 이상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도력과 능력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베나지르 부토는 죽기전 그의 아들 빌라왈 부토가 가문의 정치를 계속 이어줄 후계자가 될 것이라며 일찍 아들을 정치계에 입문시키기 위해 교육시킨 것으로 전해 집니다. 

 

부토 가문은 파키스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정당인 PPP의 주축입니다. 그들의 정치적 이력은 변동성과 불안정성, 그리고 부패와 암살이라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파키스탄의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빌라왈 부토의 미래 행보가 그들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오늘은 파키스탄 총선의 주요 정당인 PPP당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파키스탄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